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탈린그라드 전투 (문단 편집) == 기타 == * [[추축군]]의 피해 : 사상 76만 명 및 포로 9만 명[* [[이탈리아군]]과 [[루마니아군]], [[헝가리군]]을 포함한다. 이 3국 군대의 희생은 사망/부상/포로를 합쳐 37~38만 명이다.] * [[소련군]]의 피해 : 사상자 110만 명 추정[* 민간인은 제외. 민간인은 순수한 스탈린그라드 거주 민간인 희생자만 5만 명을 넘는다. 또한 전투 개시 이전 인구 30만 중 5만 이상은 의용군으로서 전투에 참가하였고 이들에 대한 통계는 불확실하다.] 전후 스탈린그라드 전투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소련에서는 거대한 동상 [[어머니 조국상]]을 세웠는데, [[자유의 여신상]]과 자주 비교되기도 한다. 전쟁 기간 중 노획한 독일군 철모를 녹여 만든 고철들도 재료로 투입되었다. 전체 높이는 자유의 여신상보다 낮지만 인물상의 크기는 이쪽이 더 크다. 지금은 [[볼고그라드]](구 스탈린그라드)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고 있다. 또 전투 패배 후 포로로 수감된 독일군 [[군의관]] 겸 [[목사]] 쿠르트 로이버(Kurt Reuber, 1906-1944)가 전투 중 그린 [[스탈린그라드의 성모]]도 독일에서 전쟁의 비참함을 상기시키는 작품으로 남아 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기점으로 소련 당국의 [[프로파간다]]는 더욱 험악해지게 된다. 종전의 소련 프로파간다는 [[나치]], [[파시스트]]를 비롯한 이념을 공격 대상으로 삼았지만 스탈린그라드를 시작으로 아예 특정 민족과 국가를 겨냥하여 '''독일놈을 죽여라'''라는 식의 프로파간다들이 등장한다. 이건 독일이 먼저 자초한 일이니 소련이 잘못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애초에 독일인들이 먼저 슬라브인들이 열등한 인종이기 때문에 박멸해야 한다고 선전했고, 실제로 그렇게 죽였으니... 이러한 기조는 1943년 소련의 유대계 언론인이자 시인인 일랴 에렌부르크(Илья Григорьевич Эренбург, 1891-1967)[* 반체제 인사로 해외에서 망명 생활을 했으나 전향하여 귀국, 스탈린에게 직접 사면받고 열렬히 활동했다.]가 '독일인은 인간이 아니다!' 나 '죽여라! 독일인 시체만큼 통쾌한 건 없다!' 등의 노골적인 반독일 선전 문구가 든 시를 발표하며 정점을 찍었다. 하지만 전쟁 종결 직전인 1945년 4월 소련 공산당 당기관지 [[프라우다]]에서 에렌부르크의 반독 경향을 너무 지나치다고 비판하면서 이런 식의 증오에 기반한 선전은 수그러들었다. 소련 공산당과 정부에서는 2차 대전 승리 후 독일 점령 지구의 민심을 다독이며 자신들에게 호의적인 정권을 세워야 한다는 큰 그림을 미리 그려놓았기 때문에, 승리를 눈앞에 둔 상태에서 저런 식의 선전은 해롭다고 평가했기 때문이다. 1943년 새해를 맞은 6군 사령부의 높으신 분은 심기가 매우 불편해졌다. 어느 간 큰 병사들이 사령부 벽에 "우리는 집에 가고 싶다", '''"히틀러는 지옥에나 가라"'''라는 낙서가 그려졌기 때문이라고.[* 출처: 피의 기록 스탈린그라드][* 흥미로운 점은 전쟁 중반으로 갈수록 히틀러와 나치에 대한 국방군의 시선이 안 좋아지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었는데 오토 카리우스의 자서전에도 소련을 무찌르고 나면 나치당원들을 혼내주겠다던 대화나 동부전선의 참혹함이 독일 내부로 들어가며 독일군 병사들이 필사적으로 빽을 이용해 서부전선이나 덴마크, 노르웨이로 도망가려고 했던 사례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2023년]] [[2월 2일]] 부로 스탈린그라드 전투 승전 80주년을 맞게 되었으며, [[볼고그라드]] 과거의 스탈린그라드에서 [[스탈린그라드 전투 승리 80주년 퍼레이드]]를 개최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